최근 SK바이오팜이 방사성의약품 분야에 어마어마한 투자를 하고 있다. 2024년과 2025년 2년 동안 후보물질 두 개를 들여오는 데만 1조 6,000억원을 썼다. 작년 7월에는 홍콩 풀라이프 테크놀로지로부터 FL-091이라는 물질을 8,000억원에 도입했고, 올해는 미국 위스콘신대학에서 WT-7695를 8,425억원에 들여왔다.
솔직히 이 정도 금액이면 웬만한 중견기업 인수 금액과 맞먹는다. 그런데 SK바이오팜은 왜 방사성의약품에 이렇게 큰돈을 베팅하는 걸까.
세노바메이트 하나에 매달릴 순 없으니까
SK바이오팜을 아는 사람이라면 세노바메이트라는 뇌전증 치료제를 떠올릴 것이다. 상품명으로는 엑스코프리로 불리는 이 약은 현재 SK바이오팜 매출의 거의 전부를 책임지고 있다. 2024년 전체 매출 5,476억원 중에서 무려 97%인 5,312억원이 세노바메이트에서 나왔다.
2029년쯤 되면 이 약 하나로만 매출 1조원을 찍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2032년에 특허가 만료된다는 점이다. 특허가 끝나면 제네릭 의약품이 쏟아져 나오고, 매출은 급격하게 떨어지게 마련이다.
회사 입장에서는 7년 뒤를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SK바이오팜은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야 했고, 그 답으로 방사성의약품을 선택했다.
방사성의약품이 뭐길래
방사성의약품은 쉽게 말하면 방사성동위원소를 이용해서 암세포를 직접 공격하는 치료제다. 일반 항암제는 온몸을 돌아다니면서 암세포뿐 아니라 정상 세포도 공격해서 부작용이 심한데, 방사성의약품은 암세포만 골라서 타격을 준다.
약물과 진단 기술, 그리고 방사성동위원소를 결합한 형태라서 기술적으로도 꽤 복잡하다. 대표적인 제품으로는 노바티스가 만든 플루빅토라는 전립선암 치료제가 있다. 이 약은 2024년 약 1조원의 매출을 올렸고, 전년 대비 42%나 성장했다.
그런데 중요한 건 플루빅토가 잘 나간다고 해서 노바티스가 시장을 완전히 장악한 건 아니라는 점이다. 방사성의약품 시장은 아직 초기 단계여서 누구든 주도권을 잡을 가능성이 열려 있다.
시장은 커지는데 경쟁자는 적다
글로벌 방사성의약품 시장 규모는 2024년 기준 67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9조 8,000억원 정도다. 그리고 이 시장은 매년 8%씩 성장해서 2034년에는 144억 달러, 약 21조원까지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10년 뒤면 지금보다 두 배 이상 큰 시장이 된다는 얘기다. 게다가 아직은 절대 강자가 없는 상황이라서 선점 효과를 누릴 수 있다. SK바이오팜이 지금 큰돈을 들여서라도 시장에 뛰어드는 이유다.
회사 관계자는 “중추신경계 중심 사업에서 벗어나 항암 분야로 외연을 넓혀 성장성을 확보하고 고부가가치 정밀의료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방사성의약품을 차세대 축으로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방사성의약품은 아직 글로벌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초기 시장이라는 점이 전략적 기회라고 판단한 것이다.
진입장벽이 높다는 건 양날의 검
방사성의약품 개발은 일반 의약품보다 훨씬 까다롭다. 방사성동위원소를 생산하고 공급하는 체계부터 시작해서 방사선 차폐 설비, 전문 인력, 의약품과 원자력 분야의 이중 규제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특히 핵심 원료인 방사성동위원소는 연구용 원자로에서만 생산할 수 있는데, 이런 원자로가 전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정도다. 그래서 루테튬이나 악티늄 같은 핵심 동위원소는 항상 공급이 부족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렇게 진입장벽이 높다는 건 나쁜 소식이기도 하지만 좋은 소식이기도 하다. 일단 인프라를 갖춰놓으면 나중에 경쟁자가 쉽게 들어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SK바이오팜 관계자의 말을 빌리면 “선제적으로 투자한 기업에 유리한 구조가 형성되는 시장”이라는 것이다.
SK바이오팜은 이미 준비를 끝냈다
SK바이오팜이 방사성의약품을 선택한 데는 나름의 복안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핵심 원료인 악티늄 공급망을 이미 확보했다는 점이다. 미국 테라파워와 악티늄 공급 계약을 체결했고, 올해 12월 3일에는 독일 애커트앤지글러와도 추가 계약을 맺었다.
악티늄은 강력한 알파입자를 방출해서 차세대 방사선 표적치료제로 주목받는 물질이다. 그런데 생산 설비와 공정이 제한적이어서 글로벌 공급난이 반복되는 동위원소이기도 하다. SK바이오팜은 북미와 유럽에서 공급망을 확보해서 원료 리스크를 줄인 셈이다.
여기에 SK바이오팜은 저분자 화합물 신약을 상업화한 경험도 갖고 있다. 세노바메이트가 바로 저분자 화합물 기반 신약인데, 방사성의약품도 저분자 기반이다. 그래서 기존에 쌓은 개발 역량과 노하우를 활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단순히 약만 개발하는 게 아니다
SK바이오팜의 전략은 단순히 후보물질을 개발해서 시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방사성의약품은 치료제 개발 기술만으로는 성공하기 어려운 분야다. 연구개발부터 제조, 상업화까지 밸류체인 전체를 아우르는 설계가 필요하다.
회사는 이미 핵심 원료 공급망을 확보했고, 후보물질도 도입했다. 앞으로는 연구와 제조, 상업화를 모두 통합하는 구조를 만들어갈 계획이다. 내부 역량으로 할 수 있는 건 자체적으로 하고, 필요하면 전략적 파트너십도 맺는다.
상업화 방식도 유연하게 가져간다. 자체 개발과 상업화를 추진하면서도 라이선스 인과 라이선스 아웃을 병행하는 방식도 검토 중이다. 다양한 옵션을 활용해서 포트폴리오를 확장하면서 동시에 성공 가능성을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2027년까지가 중요하다
SK바이오팜은 2027년을 중요한 분기점으로 보고 있다. 이때까지 파이프라인과 자체 연구개발 플랫폼, 제조와 생산 네트워크를 확보해서 글로벌 방사성의약품 리딩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하겠다는 목표다.
이동훈 SK바이오팜 사장은 세노바메이트 이후 회사의 성장 전략을 오래전부터 고민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다양한 모달리티를 검토한 끝에 방사성의약품을 선택한 것도 SK바이오팜의 대내외 여건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결정이었다.
방사성의약품 시장은 성장성은 크지만 진입장벽도 높은 분야다. 그래서 초기 단계에서 얼마나 빨리 인프라를 구축하느냐가 향후 경쟁력을 좌우한다. SK바이오팜은 지금 그 초기 투자를 하고 있는 셈이다.
1조 6,000억원이라는 거금을 방사성의약품에 쏟아붓는 SK바이오팜의 전략이 성공할지는 앞으로 몇 년이 지나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분명한 건 세노바메이트 하나에 의존하던 구조를 벗어나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려는 회사의 의지만큼은 확실해 보인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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