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홍콩 코즈웨이베이 쇼핑가에 가면 재밌는 걸 볼 수 있다. 스투시나 칼하트 같은 글로벌 브랜드 사이에 한국 브랜드들이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마뗑킴, 마리떼프랑소와저버, 마르디메르크디. 이른바 ‘3마’로 불리는 이 브랜드들이 팍샤 로드에 나란히 매장을 열고 있다.
평일 낮인데도 매장 안은 사람들로 붐빈다. 대부분 20~30대 여성들이다. 홍콩 현지인도 있고 중국에서 온 관광객도 있다. 한 홍콩 여성은 “K팝 아이돌들이 입은 옷을 SNS에서 보고 찾아봤는데, 깔끔한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자주 온다”고 말한다. 거리를 걸어도 마뗑킴 가방을 멘 여학생이나 마리떼 니트를 입은 직장인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숫자로 보는 K패션의 성장
국가데이터처 통계를 보면 K패션의 성장세가 확실히 보인다. 지난해 온라인 해외직접판매에서 의류 및 패션 관련 상품 판매액이 3545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대비 12% 성장한 수치다. 2014년에는 1743억원이었으니까 10년 만에 두 배가 넘게 커진 셈이다.
물론 아직 K뷰티의 9912억원에 비하면 규모가 작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성장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K뷰티나 K푸드가 그랬던 것처럼 K패션도 이제 본격적인 수출 동력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어떻게 해외에서 먹히는 걸까
K패션 브랜드들의 전략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먼저 팝업스토어로 시장 반응을 본다. 반응이 좋으면 정규 매장을 연다. SNS에서 K팝 스타가 입은 사진이 돌면서 인지도가 먼저 생기고, 그 다음에 오프라인 매장에서 직접 보고 사는 구조다.
실제로 마뗑킴의 올해 하반기 중화권 매출은 상반기보다 49%나 늘었다. 업계에서는 이들이 중화권에서 자리를 잡은 다음 유럽이나 미국으로 확장할 거라고 본다. 지금 중화권에서 쌓은 경험과 브랜드 이미지가 다른 지역 진출의 발판이 될 거라는 것이다.
신진 브랜드만 해외로 나가는 건 아니다. 대형 패션사들도 속도를 내고 있다. LF는 헤지스 러시아 2호점을 열었고 인도와도 새로 계약을 맺었다. 자회사 씨티닷츠의 던스트는 올해 미국에서 기업간거래 매출이 전년 대비 110%나 증가했다. 한섬은 방콕에서 패션쇼를 열었고, 내년에는 파리 갤러리 라파예트에 시스템옴므 매장을 연다. 코오롱스포츠는 작년에 중국에서만 75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무신사 같은 플랫폼도 재밌는 시도를 하고 있다. 국내 브랜드들을 묶어서 함께 해외로 나가는 ‘연합 진출’ 방식이다. 물류나 마케팅 인프라를 플랫폼이 제공하니까 개별 브랜드 입장에서는 진입장벽이 낮아진다. 무신사는 이번 달 중국 상하이에 첫 해외 오프라인 스토어를 열고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해외 사업을 확대할 계획이다.
K패션이 경쟁력 있는 이유
한국 패션 산업은 기본기가 탄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섬유 소재를 만드는 것부터 디자인 기획, 옷을 만드는 제조 능력까지 전 과정을 다 갖추고 있다. 국내 제조사들은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나 패션 브랜드의 제품을 만들어줄 만큼 기술력도 인정받는다.
거기다 트렌드에 빠르게 반응하고, 품질 대비 가격도 합리적이다. 특히 요즘 젊은 세대가 좋아하는 미니멀하고 깔끔한 디자인에서 한국 브랜드들이 강점을 보인다. K팝이나 K드라마를 통해 한국 스타일에 이미 익숙한 해외 젊은 층에게 자연스럽게 어필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시장에서는 분명히 성과가 나오고 있는데, 정작 이를 뒷받침할 정책 기반은 여전히 부족하다. K패션 산업 규모가 연 85조원인데도 이를 총괄하는 근거법이 없다. 섬유나 제조 중심의 개별 육성책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이다.
패션을 문화나 콘텐츠 산업으로 보는 법적 틀이 없다 보니 해외 진출 지원도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지식재산권 보호, 전문 인력 양성, 산업 통계 구축 같은 기본 인프라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문화체육관광부의 패션 관련 예산은 연 500억원도 안 된다. K뷰티가 초기 진입 단계에서 받았던 지원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특히 중소 브랜드나 신진 디자이너들이 어려움을 겪는다. 대기업은 자체적으로 법무팀이나 해외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지만, 작은 브랜드들은 통관이나 관세, 세금 같은 기본적인 절차에서도 막힌다. 디자인이 도용당해도 대응하기 어렵고, 해외 전시회 참가비나 마케팅 비용도 부담스럽다.
업계에서 요구해온 패션산업진흥법은 국회에 발의만 되고 심의가 멈춰 있다. 이 법안에는 산업을 체계적으로 키우고, 창작 활동을 지원하고, 해외 진출을 돕고, 지식재산권을 보호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하지만 몇 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지금이 골든타임이다
한국패션협회 성래은 회장은 “K패션은 이미 디자인, 제조능력, 가격 경쟁력 등 여러 면에서 글로벌 시장을 사로잡을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정책과 제도적 지원을 추진해야 하는 골든타임이 왔다”고 강조한다.
아주대 이종우 교수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패션은 식품이나 화장품보다 현지 소비자와의 접점 관리가 더 중요하다. 중소 브랜드를 위한 전담 조직이나 플래그십 공간, 현지 매체 활용 같은 지속적인 지원 체계를 갖춰야 한다.” 그는 “해외 시장은 자리 잡기 어렵지만 한번 자리 잡으면 확산 속도가 빠르다”며 “지금 전략을 정비하지 않으면 K패션의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K뷰티를 보면 답이 나온다. K뷰티도 처음부터 잘된 건 아니었다. 초기에 정부가 해외 박람회 참가나 마케팅을 적극 지원했고, 법과 제도를 정비했다. 그렇게 탄탄한 기반을 만들어놓으니까 지금처럼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는 산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K패션도 지금 비슷한 시점에 와 있다. 시장에서는 이미 반응이 나오고 있고, 브랜드들도 하나둘 성과를 내고 있다. 문제는 이 흐름을 더 크게 키울 수 있는 지원 시스템이다. 중소 브랜드들이 해외에 나가서 겪는 실질적인 어려움을 덜어주고, 디자인 도용 같은 피해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단계별로 성장을 지원하는 체계도 필요하다. 처음 진출할 때는 시장 조사나 초기 마케팅을 도와주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플래그십 스토어 운영을 지원하고, 안정화 단계에서는 현지 유통 네트워크 구축을 돕는 식이다. 전문 인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글로벌 패션 비즈니스를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
세계 시장은 이미 K패션에 문을 열어주고 있다. 홍콩이나 중국의 젊은이들이 한국 브랜드 매장 앞에 줄을 서고, 대형 패션사들이 하나둘 해외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 이제 필요한 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대로 키워낼 수 있는 시스템이다. K뷰티와 K푸드가 그랬던 것처럼, K패션도 한국을 대표하는 수출 산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시점이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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