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름 만에 17조 3천억원 규모 배터리 공급 계약 취소, 6대 업체 연매출의 34% 증발
- 미국 트럼프 정부의 전기차 지원 중단과 EU의 내연기관 금지 철회로 글로벌 수요 급감
- LG에너지솔루션·엘앤에프 등 주요 업체 연쇄 타격, 업계는 2025년 이후 회복 전망
전기차 캐즘, 다시 찾아온 암흑기
글로벌 전기차 시장이 다시 한번 ‘캐즘(Chasm)’에 빠져들고 있다. 캐즘이란 신기술이 초기 수용자를 넘어 대중 시장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수요 정체 현상을 뜻한다. 2023년 잠시 주춤했던 전기차 시장이 회복세를 보이는 듯했지만, 2024년 말 다시 찾아온 한파는 그 어느 때보다 혹독하다.
30일 업계에 따르면 지난 17일 이후 보름도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국내 배터리·소재 업체가 통보받은 계약 취소 규모는 17조 3천억원에 달한다. 이는 국내 6대 배터리·소재 업체의 2024년 예상 매출액 51조 4천억원의 34%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불과 2주 만에 연간 매출의 3분의 1이 공중분해된 셈이다.
미국發 충격파, 한국 배터리 산업 강타
포드·테슬라 계약 취소 도미노
계약 취소의 진원지는 단연 미국이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 직후 친환경 정책을 전면 폐기하면서 전기차 시장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 9월 전기차 구매 시 최대 7,500달러(약 1천만원)를 지원하던 세액공제 제도가 중단되면서 미국 전기차 판매량이 급락했다.
국내 최대 배터리 제조사 LG에너지솔루션이 가장 먼저 직격탄을 맞았다. 지난 17일 포드로부터 9조 6천억원 규모의 전기차 배터리 공급 계약 해지 통보를 받은 데 이어, 26일에는 미국 배터리 팩 제조사 FBPS가 사업 철수를 선언하며 3조 9천억원 규모 모듈 공급 계약마저 취소됐다.
양극재 업체까지 번진 연쇄 충격
충격파는 배터리 완제품 업체에서 그치지 않았다. 29일에는 양극재 생산 업체 엘앤에프가 테슬라와 체결했던 3조 8천억원 규모의 소재 공급 계약이 사실상 무효화됐다. 계약 금액이 973만원으로 감액되면서 실질적으로 계약이 소멸한 것이다. 테슬라의 사이버트럭 생산 계획이 대폭 축소되면서 발생한 일이다.
배터리 산업은 완성차-배터리 제조-소재 공급으로 이어지는 긴밀한 공급망으로 구성돼 있다. 완성차 업체의 수요 감소는 곧바로 중간재·소재 업체까지 연쇄 타격을 입히는 구조다. 업계 관계자는 “현재까지 드러난 계약 취소는 빙산의 일각”이라며 “다른 완성차 업체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줄을 이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전 세계가 속도 조절… 정책 변화의 쓰나미
트럼프의 역주행, EU의 후퇴
미국의 정책 변화는 단순히 보조금 중단에 그치지 않는다. 트럼프 행정부는 바이든 정부가 추진했던 IRA(인플레이션 감축법)의 전기차 관련 조항들을 차례로 무력화시키고 있다. “미국 제조업 부흥”이라는 명분 아래 내연기관 자동차 산업 보호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대서양 건너 유럽도 마찬가지다. EU는 2035년부터 내연기관 자동차 판매를 전면 금지하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지만, 최근 이 규정을 철회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독일·프랑스 등 자동차 강국들이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브레이크를 밟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의 저가 공세까지 가세
설상가상으로 중국 업체들의 공격적인 저가 전략이 시장을 더욱 어지럽히고 있다. BYD를 비롯한 중국 전기차 제조사들은 막강한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파격적인 가격으로 유럽·아시아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배터리 분야에서도 CATL(닝더스다이) 등 중국 업체들이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확대하는 중이다.
한국 배터리 업계는 기술력에서는 앞서지만 가격 경쟁에서는 밀리는 형국이다. 중국 업체들이 LFP(리튬인산철) 배터리로 저가 시장을 장악하는 동안, 한국 업체들은 고성능 NCM(니켈·코발트·망간) 배터리에 주력해왔다. 하지만 전기차 보급이 둔화되면서 프리미엄 배터리 수요마저 위축되는 악순환에 빠졌다.
K배터리의 미래, 어디로 가나
업계의 조심스러운 낙관론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업계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한 배터리 업계 고위 관계자는 “최근 완성차 업체들이 중소형이나 고급 차량 등 수익성이 좋은 모델로 ‘선택과 집중’ 전략을 펼치고 있다”며 “2025년 이후부터는 바닥을 찍은 전기차 배터리 수요가 점진적으로 회복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일부 완성차 업체들은 무분별한 전기차 라인업 확대 대신 수익성 중심의 포트폴리오 재편에 나서고 있다. 저가 전기차보다는 프리미엄 모델에, 대형 SUV보다는 효율적인 중소형 차량에 집중하는 식이다. 이는 고성능 배터리에 강점을 가진 한국 업체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구조조정과 체질 개선의 시간
단기적으로는 고통스럽겠지만, 이번 위기가 한국 배터리 산업의 체질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동안 양적 성장에 치중했던 업계가 원가 절감과 수익성 개선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이미 북미 공장 가동률 조정과 인력 재배치 등 비상 경영 체제에 돌입했다. 삼성SDI와 SK온도 신규 투자를 보류하고 기존 설비의 효율화에 집중하고 있다. 업계 전반이 ‘성장’에서 ‘생존’으로 키워드를 바꾼 셈이다.
정부와 기업, 함께 풀어야 할 숙제
전문가들은 이번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기업 차원에서는 원가 경쟁력 확보와 차세대 배터리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해야 하고, 정부는 R&D 지원 확대와 함께 국내 전기차 시장 활성화를 위한 정책적 뒷받받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장기적 관점의 전략 수립이다. 글로벌 전기차 시장은 단기적 부침을 겪고 있지만, 탄소중립과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큰 흐름은 변하지 않는다. 한국 배터리 산업이 이번 빙하기를 현명하게 버텨낸다면, 다시 찾아올 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봄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올지는 아직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지금은 긴 겨울을 준비하며, 체력을 비축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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