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로봇 산업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동안 일본과 중국이 꽉 잡고 있던 로봇 감속기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이 빠르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감속기라는 게 생소할 수 있는데, 쉽게 말하면 로봇의 관절 같은 부품이다. 모터가 빠르게 돌아가는 속도를 줄이고 대신 힘을 세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자동차 변속기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로봇 전체 가격의 30~40%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하고 비싼 부품이다.
일본과 중국이 놓친 틈새를 파고들다
그동안 이 시장은 일본 기업들이 기술력으로, 중국 기업들이 가격으로 양분해왔다. 그런데 일본 제품은 너무 비싸고 납품도 오래 걸린다는 게 문제였다. 중국 제품은 싸긴 한데 정밀도가 떨어지고 내구성이 약하다는 약점이 있었다.
한국 기업들은 바로 이 지점을 노렸다. 일본보다 빠르고 저렴하면서도 중국보다 품질이 좋은 제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024년 말 현재, 실제로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에스피지가 보여주는 가능성
국내에서 가장 주목받는 기업은 에스피지다. 이 회사는 로봇 감속기 3종류를 모두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유성 감속기는 4족 보행 로봇처럼 힘이 많이 필요한 곳에 쓰이고, 하모닉 감속기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협동로봇의 정밀한 움직임에 필요하다. 사이클로이드 감속기는 대형 산업용 로봇처럼 충격을 많이 받는 곳에 들어간다.
에스피지는 지금 한 발 더 나아가고 있다. 감속기에 모터까지 결합한 액추에이터라는 모듈을 만들어서 2025년 상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양산한다는 계획이다. 부품 하나만 파는 게 아니라 통합 모듈로 사업을 확장하는 것이다.
회사 측에 따르면 시제품 기준으로 중국산보다 정밀도는 2배 높고 무게는 10% 가볍다고 한다. 이 정도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어 보인다.
미국의 탈중국 움직임이 만든 기회
타이밍도 좋다. 최근 미국 기업들이 중국산 로봇 부품 사용을 줄이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대표적이다.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를 양산하면서 중국 부품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밝혔다.
공급망 불안정성과 지정학적 리스크를 고려하면 당연한 선택이다. 그런데 일본 제품은 비싸고 납기도 길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기업들이 제3의 선택지로 떠오르고 is다.
에스피지 관계자는 이러한 반사이익을 빠르게 누리기 위해 내년 상반기 미국 수출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지금 레인보우로보틱스의 협동로봇과 양팔로봇 전 모델에 감속기를 단독으로 공급하고 있고, 4족 보행 로봇과 자율주행로봇으로도 공급 범위를 넓히고 있다. 미국의 주요 로봇 제조사와도 거래를 논의 중이라고 한다.
숫자로 보는 성장세
실적도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다. 에스피지의 2024년 3분기 누적 영업이익은 129억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31% 늘었다. 올해 로봇 감속기 매출은 100억원대 후반으로 드디어 손익분기점을 넘었다.
더 흥미로운 건 내년 전망이다. 2025년에는 로봇 감속기 사업에서만 300억원대 매출이 예상된다. 이 부문에서 회사 설립 이후 처음으로 흑자를 낼 것으로 보인다.
주가도 가파르게 올랐다. 2024년 11월 말 기준으로 에스피지 주가는 연초 대비 121%나 급등했다. 시장이 이 회사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다른 기업들도 움직인다
에스피지만 주목받는 건 아니다. 하모닉 감속기를 만드는 에스비비테크는 독자적인 치형 설계 기술로 고객 맞춤 제작을 강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일본 경쟁사보다 70% 수준의 가격으로 공급하면서도 품질을 유지한다는 게 이 회사의 자랑이다.
협동로봇 시장이 빠르게 커지면서 하모닉 감속기 수요도 늘고 있다. 부국증권 김성환 연구원은 협동로봇 시장 침투율이 높아지는 만큼 국산화 대체 수요가 계속 증가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에스비비테크 주가도 올해 48% 올랐다.
산업용 유성 감속기를 주력으로 하는 우림피티에스는 로봇용 정밀 유성 감속기와 사이클로이드 감속기 라인을 확장하고 있다. 이 회사 주가도 53% 상승했다. 자동차 변속기 부품 회사인 디아이씨도 기어 가공 기술을 응용해서 로봇 감속기 시장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다.
그래도 조심스러운 부분은 있다
물론 장밋빛 전망만 있는 건 아니다. 증권가에서는 신중한 접근을 주문하고 있다. 정밀 감속기 사업은 결국 로봇 시장이 얼마나 빠르게 성장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로쓰리서치 이재모 연구원은 글로벌 경기가 둔화되면 기업들의 설비 투자가 줄어들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예상보다 매출 확대가 늦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방 산업의 흐름을 계속 지켜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로봇 산업은 아직 초기 단계다. 휴머노이드 로봇이 일상에서 흔하게 보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협동로봇도 제조업 현장에서 점점 늘고 있지만 아직 보편화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2026년이 중요한 이유
그럼에도 2026년은 한국 로봇 감속기 산업에 중요한 해가 될 것 같다. 에스피지를 비롯한 주요 기업들이 흑자전환을 이루고 미국 시장에 본격 진출하는 원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피지컬 AI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로봇이 단순히 정해진 동작만 반복하는 게 아니라 인공지능을 탑재해서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는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테슬라의 옵티머스, 보스턴다이내믹스의 아틀라스 같은 휴머노이드 로봇들이 대표적이다.
이런 로봇들이 실제로 양산되고 보급되려면 감속기 같은 핵심 부품의 안정적인 공급이 필수다. 그리고 그 공급망에서 한국 기업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과 중국이 양분하던 시장에서 한국이 제3의 축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지, 내년쯤이면 좀 더 명확한 그림이 나올 것 같다. 로봇 산업의 성장과 함께 한국 부품 기업들의 약진도 지켜볼 만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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