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8년 만에 약가제도를 대대적으로 손본다. 보건복지부가 11월 28일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 보고한 내용을 보면, 신약 가격은 올리고 제네릭 의약품 가격은 최대 25%까지 낮추는 게 핵심이다.
사실 한국의 신약 약가는 그동안 너무 낮았다. GDP 대비 혁신 의약품 지출 비중을 보면 한국은 0.09%인데, 미국은 0.78%나 된다. 거의 9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 셈이다. 건강보험에서 신약에 쓰는 돈도 전체 약품비의 13.5%밖에 안 된다. 이건 튀르키예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그래서 벌어지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신약이 허가받고 나서 환자가 실제로 보험 혜택을 받으면서 쓸 수 있기까지 한국에서는 평균 46개월이 걸린다. 미국은 4개월, 일본도 18개월이면 되는데 말이다. 이러다 보니 글로벌 제약사들이 한국 시장을 뒤로 미루거나 아예 출시를 포기하는 경우도 생긴다.
트럼프 정부의 약가 정책 변화가 계기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자국 약가를 최혜국 수준으로 맞추라고 제약사들한테 요구하면서 전 세계 의약품 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실제로 지난달 말부터 이달 초까지 미국제약협회 관계자들이 한국에 와서 정부와 건강보험공단 실무자들을 만나 신약 약가 인상을 촉구했다고 한다. 한국 정부가 10여 년 동안 건드리지 않던 약가 제도를 개편하게 된 배경이다.
2027년부터 신약 약가 올린다
정부는 2027년부터 신약의 경제성을 평가하는 ICER 임계값을 적정 수준으로 상향한다. 특히 생명에 직결되는 질환 치료제는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질병이 얼마나 위중한지, 치료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재정에 미치는 영향 같은 걸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가중치를 주는 방식이다.
내년 2분기부터는 약가 유연계약제도도 도입된다. 신약뿐만 아니라 특허가 끝난 오리지널 의약품, 바이오시밀러까지 실제 계약금액을 공개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이는 표시가격과 실제 계약금액을 다르게 해서 약가 협상을 좀 더 유리하게 가져가겠다는 거다. 그동안 특허 만료 후 약가가 공개되는 게 부담스러워서 한국 시장을 떠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약으로 여러 질환을 치료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면역관문억제제 키트루다 같은 항암제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치료 대상 질환이 늘어나면 오히려 약가가 내려가는 구조였다. 이것도 바꾸기로 했다.
희소질환 치료제는 건강보험 적용까지 걸리는 시간이 최대 240일에서 100일 이내로 확 줄어든다. 내년부터 시행한다.
복제약 가격은 대폭 인하
반대로 제네릭 의약품 가격은 내년 7월부터 오리지널 의약품의 53.55%에서 40% 수준으로 떨어진다. 새로 등재되는 제네릭은 바로 적용하고, 2012년에 건강보험에 들어온 뒤 13년 동안 약가 변동이 없던 품목들은 3년에 걸쳐서 단계적으로 조정한다. 이후 2013년, 2014년 등재 의약품으로 범위를 넓혀갈 계획이다.
자체 생물학적 동등성 시험 자료를 제출하지 않은 제네릭은 인하폭이 더 크다. 오리지널 특허가 끝나고 제네릭 제품이 10개 이상 나오면 약가는 더 낮아진다.
혁신형 제약기업은 우대
다만 연구개발에 투자를 많이 하는 혁신형 제약기업은 복제약 가격도 좀 더 높게 받을 수 있다. 매출 대비 R&D 비율이 상위 30%인 기업은 제네릭 약가를 오리지널의 68%까지 적용받는다. 나머지 혁신형 제약기업은 60%, 신약 개발을 위한 임상 2상 승인 실적이 3년간 한 건 이상 있는 기업은 55%다.
생산이 줄어서 퇴장 위험이 있는 필수 의약품 같은 경우도 약가를 높여서 안정적으로 공급되도록 유도한다.
제약업계 재편 예고
이번 개편으로 국내 제약산업이 크게 재편될 것으로 보인다. 복제약 판매 비중이 높은 국내 제약사들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앞으로는 신약 개발과 혁신에 집중하는 기업 중심으로 업계가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
약가 사후관리도 매년 4월과 10월로 정례화한다. 그동안 수시로 약가가 조정되다 보니 제약사 입장에서는 사업 계획을 세우기가 어려웠는데, 이제는 좀 예측 가능해진다. 신약 가치를 재평가하고 조정하는 절차는 3~5년마다 주기적으로 시행해서 약품비 지출을 관리한다.
복지부 이중규 보험정책국장은 의견 수렴을 거쳐서 내년 2월쯤 최종안을 확정할 거라고 밝혔다. 18년 만의 대대적인 약가 개편이 제약업계와 환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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